과거 우리의 기억 속에서, 중동 지역의 전쟁은 곧 '국제 유가 급등'과 '오일 쇼크'라는 공포와 동의어였습니다.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지에 불이 붙으면, 전 세계 기름값이 치솟고 우리 생활 경제까지 휘청거리는 것이 당연한 공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공식이 깨졌습니다. 중동 지역에서 몇 달째 심각한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국제 유가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 왜?"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요,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유 1: '셰일오일' 파워, 미국의 압도적인 생산량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미국의 힘'입니다. 과거 중동 산유국들의 입김에 전 세계가 휘둘리던 시절과 달리, 지금 미국은 '셰일 혁명' 덕분에 세계 1위의 압도적인 산유국으로 등극했습니다.
미국이 하루에 생산하는 막대한 양의 셰일오일은, 이제 글로벌 원유 시장의 거대한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중동에서 공급 차질이 발생하더라도, 미국이 생산량을 늘려 그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시장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가 중동에만 목을 매던 시대가 끝나면서,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유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과거보다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유 2: OPEC+의 '여유 생산 능력'이라는 보험
두 번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의 '감산 정책' 덕분입니다. 이들은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해 현재 자발적으로 원유 생산량을 줄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는 곧, 이들에게 유사시에 즉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여유 생산 능력(Spare Capacity)'이 비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중동 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실제 원유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요 산유국들이 즉시 증산에 나서 유가를 안정시킬 것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는 셈입니다. 시장 참여자들 역시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섣불리 패닉에 빠지지 않고, 유가는 안정세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유 3: '세계 경제 둔화'…기름 쓸 곳이 줄었다
마지막 이유는 '수요' 측면에 있습니다. 바로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 경제의 성장세 둔화입니다.
공장 가동률이 떨어지고, 물류 이동량이 줄어드는 등 세계 경제가 활력을 잃으면, 자연스럽게 원유에 대한 수요도 감소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름을 사용하려는 곳 자체가 줄어드니, 공급에 대한 불안감이 있더라도 유가가 쉽게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한 '공급 불안' 심리를, 경기 둔화로 인한 '수요 감소' 심리가 팽팽하게 상쇄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이유가 만들어 낸 안정세가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중동 분쟁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전면전으로 확전되거나, 세계 경제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될 경우,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언제든 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세계 석유 시장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안정의 방정식을 써 내려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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